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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박쓰 

 

추수

2015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퍼포먼스, 설치, 비디오

내 1600명의 마조히스트들에게.

마조박쓰에 홀로 들어가면 초록 조명 아래 소설 한편이 걸려있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프린터는 또 하나의 글을 뱉어냅니다. 그 글은 웬일인지 박쓰 안에 앉아있는 그대에 관한 글입니다. 마조박쓰는 그대의 이름을 읊고, 오늘 옷을 얇게 입은 그대를 걱정하거나, 그대의 머리모양을 정확하게 짚어내며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남용과 폭력.

그대를 설레게 하고 궁금하게 하고 때로는 무섭게 만들거나 웃음을 주기도 하는 마조박쓰의 실체는 ‘남용’과 ‘폭력’입니다. 그대를 마주하고는 할 수 없었을 이야기들을 나는 전시장Museum이라는 공간의 특성을 빌어 뱉어냅니다. 전시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에, 너와 내가 하는 무언의 계약에 대해 그대는 알고 계시는지요? 우리는 모든 수용의 장벽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약속을 합니다. 전 인류가 내게 가장 관대해 지는 시간, 그 특권을 나는 조용하게 남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대들은 세상에 날 때부터 폭력에 노출되고, 그렇게 맞아왔고, 그 매질에 반기를 들 의지조차 삭제 당했습니다. 이제는 맞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어쩌면 몇몇은 완전히 무릎을 꿇고 스스로 또 다른 자극을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르지요. 조용한 폭력을 폭발적으로 뿜어대는 사회 앞에서, 그대들에게는 결정의 자유가 없습니다. 현대의 끝없이 늘어나는 선택 옵션들은 결코 그대들의 자유를 선점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폭력을 당하고자 줄까지 서던 모습에 나는 가히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의식 밖의 낯선 이에게 느껴지는 불안의 구타를, ‘설렘’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그대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정신적ㆍ육체적 학대를 받는 데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변태 성욕을 우리는 마조히즘이라 부르니까요. 감동, 불쾌함, 신남, 시시함들 역시 틀린 감상평은 아닙니다. 전시에 대한 개인적 감상의 자유만큼은, 나는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이 전시는 그저 그대들이 얼마만큼이나 폭력 노출에 무딘가 하고 묻고 있습니다. 이 물음은, 처음에 언급한 조용한 남용으로부터 기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아, 나의 마조히스트여. 박쓰가 내어 준 글은 그대의 하얀 가슴에 검게 박힌 발길질의 흔적이어라! 부디 그 상처를 꼭 끌어 안으시오. 그대를 내 글자들이, 세계가 내뿜는 남용과 폭력으로부터 조금은 비껴가는 길로 이끌어 주기를 바라면서.

2015. 12. 06.

 

마조박쓰를 마치며,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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