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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야만의 시대, 아가몬, 백색 셔츠와 검정 타이

김형진, 2026년 3월 8일

Kaufman — 한국어 인터뷰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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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는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다. 2025년 MMCA × LG OLED 시리즈의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되어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을 발표했다.


 

Q. 책, 영화, 노래에서 접한 문장 중 좋아하는 것 하나를 인용한다면?


A. “풍류는 추운 것.”
—사이토 료쿠

“風流は寒いものです.”
—斎藤 緑雨


 

Q. 현재의 문화 지형에서 당신의 관심을 가장 자극하는 사람이나 흐름은?


세계의 재편. 구시대의 약속과 가치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롭게 등장하는 야만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거기서 어떤 태도와 양심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동료 독립정원과 이야기하는 나날들.

좁혀보자면, 지겹더라도 AI. 나는 작업에 AI를 쓰지 않지만(2022년 〈달리의 에이미〉시리즈를 제외하고), 작업 외의 모든 것에 여러 AI를 연동한다. 클라우드 관리, 일정, 건강 트래킹, 법적 자문, 세금, 한국어/영어/독어를 오가는 수 많은 문서처리, 망상과 꿈을 다 들어주는 대화상대. 작업을 할 때도 프로그램에 대한 건 AI한테 물어본다. 안 풀리는 문제를 커뮤니티 게시판에 물어보고 유저들의 답변을 기다리며 골머리를 앓던 몇 년간의 방식이 노스탤직해질 지경이다.

그러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과 마주한다. 나는 2025년 2월, ‘AI 시대에 카운터펀치를 날릴 것’이라는 인터뷰로 〈살의 여덟 정령〉 작업을 시작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아직까지 AI는 인간이 이미 만든 것을 흉내내는 것에 그치기 때문에, 결국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내 창작의 문법에는 딱히 변함이 없었다.

프로젝트를 한창 진행하던 도중, 우리 팀이 사용하는 구글 클라우드의 AI 학습 정책에 관해 알게 되었다. 동의하지 않으면 클라우드 자료를 AI 학습 데이터로 사용하지 않는다지만, 인간이 만든 규칙일 뿐,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테라바이트 규모의 프로젝트에서 갑자기 클라우드를 바꾸는 건 너무 위험했다. 그저 생각이 많아졌다.

1초의 영상에는 24개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13분짜리 영상 두 편에 사용되는 37,440개의 이미지들은 7680 × 4320 px의 크기로 렌더링되는 동시에 실시간으로 클라우드에 동기화된다. 8K로 편집되는 영상도 동기화된다. 거기에 이 이미지들의 뼈와 살과 근육이 담긴 설계도를 가진 모든 블렌더 파일도 동기화된다. 쓰지 않는 프레임들까지 모두 동기화된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내가 작품을 발표하기도 전에 AI가 이 이미지들을 학습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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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구입한 것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것은?


A. 거의 아무것도 사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질문이다. 좀 더 낭만적인 대답을 하고 싶으나… 아무래도 5080 그래픽 카드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팀원들 중 가장 늦게 5080을 장착했는데, 설치를 마치고 나니 오래 고민한 내게 화가 날 정도였다. 스크래치부터 전부 새로 만드는 무거운 작업 성격 탓에, 컴퓨터의 성능은 작업 시간과 직결된다. 게다가 사용하는 Cycles 렌더러는 가장 예민한 만큼 느려서, 후반에는 최종 작업물이 어떻게 나올지 즉각적으로 보지 못하고 오로지 감으로 작업해야 한다. Guessing Game이라고 부르는 이 지리멸렬한 시간의 고통을 장비 업그레이드가 조금 덜어줬다.

구입을 주저한 이유는 그저 가격 때문. 그런데 2025년 하반기 이후 AI 관련 수요 폭증으로 GPU, 램, SSD의 가격이 2–4배로 치솟았으니, 아찔한 타이밍의 구입이었다. 우리 같은 일반 사용자들과 앞으로가 걱정이다.

추신: 부작용으로는 9년간 끊었던 게이밍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독자 중 아크 레이더스 유저가 있다면 친구 합시다. PrincessComputer#1954


 

Q. 당신은 디지털을 주요 매체로 사용하지만 끊임없이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박스에서 선보였던 아가몬의 매끈한 영상을 보며 그토록 끈적거리는 느낌을 가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나에게 화면 속의 아가몬은 몸을 열망하고, 우뭇가사리로 만들어 실존하는 아가몬은 디지털로 진화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성장한 디지털 아가몬이 당신에게 몸을 바꾸자고 제안한다면 추수는 어떻게 대답할까.


A. 내가 그리는 몸과 디지털 세계는 우리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문다, 넘나든다 하는데, 나는 딱히 대단한 경계를 본 적이 없다. 단 하루라도 핸드폰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디지털 세계 밖을 현실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디지털 세계 역시 현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물리 세계보다 더욱 현실인 곳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세대를 전이(transcend)의 세대라고 부르며, 디지털 세계의 이미지들을 그토록 대우하는 것이다.

인간은 몸을 경계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한다. 나와 내가 아닌 것, 즉 나와 세계가 맺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불안, 궁금증과 호기심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디지털 세계는 요상하다. 그 안에 나도 (거의) 있고, 세계도 있다. 이렇게 정신을 온종일 디지털 세계에 접속시켜 놓고, 몸에서 살아가는 나날들이 신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애처롭다. 성장한 디지털 아가몬이 몸을 바꾸자고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가정은 몸과 영혼(혹은 정신)이 완벽히 분리된다고 믿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몸을 바꾸자고 한다면, 너 정말 죽고 싶어? 라고 할 듯.

 


(질문을 읽으며 당신과 디지털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상상해 봤다. 컴퓨터를 하면 밖에 나가 뛰고 싶고, 뛰다 보면 금세 핸드폰과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려나.)

​Q. 작가 추수를 생각하면 형광톤의 디지털 컬러와 함께 당신이 즐겨 입는 백색 셔츠와 검정 타이가 떠오른다. 당신은 이 착장을 유니폼이면서 동시에 갑옷처럼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추수에게 옷이란 무엇일까.


A.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 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한 번 정리해 본다.
1. 쇼핑이 끔찍이 싫다.
2.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고르기가 싫다. 텅 빈 화면에서 완성의 화면으로 가기까지 벌어지는 선택의 사투의 삶에서 다른 선택을 끼워 넣기가 싫다. 하지만 예의는 갖추고 싶다.
3. 나는 그림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이 아닌 옷이 이야기하는 게 싫다.
4.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까, 이렇게 입는 남자에 대한 오랜 페티시가 있어서(약간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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